기독교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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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예화
## 위선자가 아니려면
사실, 예수님도 위선자를 싫어하셔서 엄하게 비난하였다(마 23:15).
양심에 가면을 쓴 위선자는 교회에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러한 교인들의 실수가 기독교를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인격에 달려 있지, 그들의 행동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3년이나 같이 살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활 속에서 놀라운 것, 감동만 받을 뿐이었다.
당신이 진정 위선자들을 싫어하고 같이 있기 싫어한다면 빨리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세월을 지옥에서 위선자들과 함께 가면의 인생을 살게 될테니 말이다.(목사, 이진우)
## 그리스도인의 가면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든가,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지는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요. 당신은 오래도록 교회에 그리스도인의 가면을 쓰고 다녔는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젠 가식의 가면을 벗고 당신의 실체 그대로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 두 얼굴의 집사
매우 이상한 조각이 영국 요크셔에 있는 립스톤 홀(Ribston Hall)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것은 보통 ‘두 얼굴의 집사’라고 불리운다. 한쪽 면에는 미소와 정중한 얼굴이지만 다른 쪽은 단지 오만과 무례를 나타낸 얼굴이다.
이것은 한 때 이 집에서 일하던 집사를 묘사한 것이라 한다. 하루는 이 집 여주인의 지시에 미소와 아부를 하면서도 곧 바로 여주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여주인에게 혀를 내밀며 정반대의 거만한 몸짓을 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그래서 그 집사에게 창피를 주고 또 다른 하인들이 그 집사의 두 얼굴을 흉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두 얼굴의 집사 조각을 만들어 세우라고 명하였다고 한다.(세계예화사전)
##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어느 날 아침 나는 전에 목회한 적이 있는 교회의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게 “토레이 목사님, 저는 오늘 아침 무서운 경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인데요, 노리스 목사님?”하고 물었다. 그는 그 교회의 한 교인에 대해 말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죽어가고 있는데요. 오늘 아침에 사람을 보내 저더러 와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서둘러 그녀의 집으로 갔지요. 제가 문을 열고 막 방에 들어서는데 그녀가 침대 위에서 ‘아 노리스 목사님, 저는 사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해 왔습니다. 지금 제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제 막 저는 제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라고 외치더군요.”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는 자신이 사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목상의 가면을 써온 자였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사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서도 임종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다니! 영원에 들어가서 그것을 깨닫는 것보다 이 땅에서 깨닫는 것이 낫기는 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하며 살지만 구원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의 탈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자체이어야 한다.(교수, R. A. 토레이)
## 문학이라는 가면
우리 시대에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책들은 거의 대부분이 독의 요소를 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불순하고 부도덕적인 내용들이 「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버젓이 서점 진열대에 앉아 있다. 월간, 주간 잡지들은 사치와 무질서를 은근히 부추기고 색정적인 글과 사진에 많은 지면을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소위 ‘베스트 셀러’라고 나붙은 책들이 사실은 내용이 없는 빈껍데기이기가 일쑤이다.
이런 서적들을 접할 때, 이미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순한 것들이 마중을 나온다(갈 5:1). 아예 어떤 친구들은 소위 ‘음화’라고 불리우는 사진첩을 돌리기도 한다. 이런 것들처럼 우리의 ‘상상의 세계’를 못된 곳으로 이끌고 가는 것들로부터는 피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위험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적극적인 기독교’가 있을 뿐이다. 모두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음화에 접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런 것에 함께 어울려 즐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수필류나 시집 등을 가까이 하라. 가급적 기독교 문학서적을 많이 읽고 교회 선생님이나 교역자의 조언을 받아 유익한 서적을 탐독하라. 당신의 마음의 스크린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에 비추어 초점을 맞추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히 12:2). 이제 당신의 눈은 더이상 당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자기의 귀한 피로 사신 주님께 속한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고전 6:19-20). 더이상 우리는 문학의 가면에 우리의 신앙 양심을 가리울 수는 없는 것이다.(목사, 이진우)
## 말씀을 빙자하여
마치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이 평화와 인권을 더 강조하고, 독재자들이 민주주의를 더 많이 외치듯이, 마귀는 자기가 두려운 부분을 오히려 강조하는 궤계를 통하여 실상은 그 자체를 교회 안에서 약화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를 강조하게 하여 엉뚱한 신비주의 이단자가 되게 하고, 성경 읽는 것을 강조하여 교만한 영과 혼합시켜 엉뚱한 거짓 교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심지어 ‘예수를 바로 믿자’, ‘말씀대로 살자’ 하는 것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전통교회를 비판하고 완전히 무시하면서 자기끼리의 단체를 만들게 하여 지상 교회를 분열시키는 악랄한 짓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탄의 고등 전술을 모르고 그런 이단에 넘어가는 한국교회 교인들도 큰문제이다.(목사, 노록수)
## 마음의 가면을 벗으려면
사람의 마음 속에는 늘 두 가지의 마음이 있어서 작은 일도 서로 다투는 의지의 대립이 끊이질 않는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부지런한 마음과 게으른 마음, 긍정적인 마음과 부정적인 마음, 소극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마음 등이 그것이다.
이런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그냥 두면 대체로 이기는 쪽은 항상 게으른 마음과 부정적이며 소극적인 마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고 고장난 사람은 항상 자신의 부정적이고 게으른 욕망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놀고 싶은 마음, 잘못된 마음이 일어날 때, “그럼, 안돼!”하고 스스로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각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훈련을 거듭함으로 해서 단련되고 강해지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커피나 텔레비전 시청을 한 일주일쯤만 통제해 보라. 물론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마셔도 괜찮아, 마시면 안돼” “오늘만 보면 괜찮아, 보면 안돼.” 작은 습관 하나를 고치고 끊는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넘어지고 좌절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은 것을 참고 견디는 훈련에서부터 우리들의 의지는 강해진다. 처음부터 크게 많이 길들여지고 인내하려고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 어제 참을 수 없었던 것을, 오늘은 인내하고 견딘다면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여러분의 의지는 그만큼 강해지고 단련되어 있는 것이다. 부디 작은 일, 쉬운 일에서부터 자신의 의지를 단련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이기는 훈련을 거듭하시기를 바란다.(시인, 김남조)
## 이단이라는 가면
이단이란 겉으로는 기독교임을 표방하지만, 그 정체를 알아보면 비 성경적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이비 집단을 말한다. 보통 독버섯이 더 아름답듯이 이단은 더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 모든 이단들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해 다른 주장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단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 어떤 의식, 특정 인간 -을 그리스도와 같은 위치에 놓는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다 해도 그리스도 외의 그들만의 독특한 무엇이 있어야 함을 가르친다.
둘째, 이단들은 자기들의 교주를 터무니없이 높인다.
이단의 교주들은 사람들을 자기들 뜻대로 조정하고 때로 위협하며 권력과 돈을 누린다. 이단은 대개 집단화하며, 일상적인 삶을 배타하며, 특히 사람들의 신앙이 커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추종자들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자기에게만 의존토록 유도한다.
우리가 늘상 쓰는 화폐에는 언제나 위조지폐가 있듯이, 기독교 이단도 초기부터 발생, 소멸해 왔다(요이 1:7-11). 이상한 체험, 신비주의를 강조하며 기성 교인들을 유혹해 왔던 것이다.
## 내가 가진 가면
얼마전 거울 가게 앞을 지나다 이상한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었지만, 그것이 내 얼굴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견딜수가 없었다. “바로 저 거울에 비친 얼굴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 얼굴의 주인공을 과연 똑같은 인물로 알고 있을까?”라고 거울을 향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난 거울에 비친 그 얼굴의 한 복판에서 떨며 울고 있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통회하는 마음이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저 거울 속에 비친 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나에 대한 느낌에 따라 나눌 때 여러 종류로 나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어떤 이들은 저 얼굴을 정직한 목사로 알고 있을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거짓말쟁이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는 무례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삯꾼 목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 ?
내가 본 나의 얼굴은 한 가지이지만, 세상에 비춰져 평가받고 있는 나의 얼굴은 천 개의 가면을 한 꼴에 불과한 것이다. 얼굴에 묻은 더러운 것을 씻는다고 세수를 하고 심지어 목욕까지 하지만, 다른 가면에 묻은 때는 여전히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미 나는 나의 가면에 익숙해 있다. 나를 A형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A형같이 행동하며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가던 길을 계속 재촉하며 나는 마지막으로 무서운 생각을 가지며, 거울을 떠나버렸다. 하나님은 저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어떤 인간으로 보고 계실까?(목사, 이신구)
## 사탄의 본심
인간을 사로잡아서 묘기를 연출케 하는 인간 조련사가 있다. 그가 누구일까? 사탄은 사람을 사로잡아 길들이고 훈련을 시켜서 묘기 대행진을 펼친다. 사람의 마음에 자기 생각을 넣어줌으로써 이를 가능케 만든다.
인간의 지능이 그토록 뛰어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의 생각을 다른 존재에게 집어 넣어서 그 생각만으로 그것을 지배할 수는 없다. 기껏해야 로봇에게 자기가 원하는 지시 사항을 입력해서 기계적인 일을 시킬 뿐이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 정체를 조금도 노출시키지 않은 채 비밀리에 숨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을 원격 조종하는 것이다.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는 말씀처럼, 마귀는 인간의 마음에 자기 생각을 넣어준다.(목사, 진영섭)
## 변형되지 않는 가면
사람의 얼굴은 수시로 변형될 수 있는 가면과도 같다. 기쁠 때는 기쁨의 가면으로 슬플 때는 슬픔의 가면으로 자동적으로 바뀌어진다. 또 화가 날 때는 분노의 가면으로 바뀌어진다. 자랑스러울 때 나타나는 으시대는 가면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 감정이 변하는 대로 자동적으로 변형되는 가면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다. 이는 가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스크린이라고 함이 바람직할 것이다. 진짜 가면은 변형되지 않는 것이다. 슬퍼도 슬픔으로 변할 줄 모른다. 기뻐도 기쁜 것으로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감추고 산다. 슬퍼도 내색할 수 없고 기뻐도 내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무감각적인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거짓과 가식속에 익숙해진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기뻐할 줄 모르며, 죄악을 범하고도 통회할 줄 몰라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으니 그 가면은 정말로 완벽한 가면이다.(강도사, 구자성)
## 단군의 자손이라 닮았나
요사이는 거리를 지나다니다가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다. 아까 봤던 아가씨를 다른 장소에서 또 만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지만, 저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있을까? 단군의 자손이라 똑같이 생긴 것인지. 똑같은 의사에게서 무엇인가를 했기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예쁘게 보이고, 멋있어지는 것도 참 좋은 일인데 이러다가는 우리 고유의 한국형 얼굴을 잃어버릴까 걱정이다. 잘생긴 가면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신 원래의 독특한 얼굴이 우리에겐 더 잘어울린다.(강도사, 구자성)
# 가문/ 가정, 레위인, 명예, 뼈, 상속, 유산, 좌우명, 지조, 출세, 출신, 형제.
## 믿음의 족보
최근에 유럽에서 돌아온 분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곳에서는 한 교회에 한 가족 몇 대의 믿음의 족보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즉 한 교회에서 할아버지가 신앙 생활을 하고 아버지가 거기서 결혼하고, 또 그 다음 세대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예가 많더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렇지는 못하지만 가급적 한 가족이 같은 교회, 한 사람이 변함없이 한 교회를 섬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먼저, 교회를 옮기려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것이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자. 다른 교우와의 문제는 내쪽에서 먼저 풀음으로, 그리고 교회에 대한 욕구불만은 내가 적극적으로 먼저 실천함으로써 풀어나가야 한다.
잘 자라던 나무를 한 번 옮겨 심으면, 한 동안은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다. 신자가 교회를 옮기는 것도 이와 흡사하다. 때로는 습관적으로 교회를 옮기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신앙은 보통 기형적으로 변해 있음을 보게 된다. 자, 지금 몸담고 있는 교회를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뭔가 내 몫의 일을 찾아 시작하라.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언제나 시끄럽고 흠이 있을 수 있음도 기억하면서 말이다.(목사, 이진우)
## 뼈대 있는 집안
깊은 바다 속에서 멸치 집안과 오징어 집안이 선을 보고 있었다. 양쪽 집안은 서로의 가문이 잘났다고 떠들며 뽐내고 있었다. 이때 오징어 집안의 어머니 오징어가 가는 다리를 쭉 뻗으며 자기들의 가문이 잘났다고 뽐내기를 하는데 그 꼴이 참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이를 지켜보던 멸치집의 가장이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얘, 멸순아 집으로 가자. 우린 뼈대가 있는 집안이란다. 저렇게 흐물거리는 남편을 어떻게 평생을 믿고 살겠니 !!!”(강도사, 구자성)
## 바뀐 가문
유교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나라는 조상을 귀히 여기고 가문을 중시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몇 대가 지나도록 제사상을 꼬박꼬박 차리는 것에서도 이러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대대로 전수되어 온 가문의 법도라든지 전통은 결코 경시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태도가 요구된다. 성도는 가문이 바뀐 사람들이다. 족보상으로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으되 우리는 새로운 영적 족보를 가지고 있다. 이 족보의 시조는 하나님이시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여기에 속하게 된다. 이 가문의 전통은 수 천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이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켜서 진정한 성도라고 말한다. 이 가문의 법은 성경이다.(목사, 황선원)
## 가문의 영광
가문의 영광을 말할 때 흔히 입신 출세와 관련짓는 것이 상례이다. 왕의 총애를 받는다든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괄목할 만한 지위에 오르게 되면, 이를 가문의 커다란 영광으로 여긴다. 많은 사람이 동경하는 명문대가란 바로 이런 집안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와 같은 입신 출세가 가문의 영광이요 커다란 자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한 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백 년 제왕의 총애를 받고 천 번 공중의 신임을 얻는 것보다 낫다. 한 번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뵙기 위해서는 평생을 비통 속에서 지내더라도 좋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문의 영광은 입신이라든지 출세 따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커다란 자랑거리이다. 이 세상의 영광이라는 것은 들의 꽃과도 같아서 무상하기 그지없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불변한다.
## 더 넓고 좋은 집
씨자리아에서 태어난 성 씨릴은 어린 아이였을 때에 크리스천이 되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그와 아버지는 그를 학대하고 드디어 집에서 쫓아냈다. 이 말을 들은 재판관이 씨릴을 불렀다. 그는 씨릴이 예수라는 이름을 자주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만일 씨릴이 그 이름을 다시 입 밖에 내지 않기로 약속만 한다면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 사이에 중재를 서겠노라고 약속했다.
어린 씨릴이 대답했다. “나는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도 좋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있게 될테니까요. 저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보다 더 좋은 삶을 선물로 받을테니까요.”(목사, 범브란트)
## 가장 좋은 가문의 전통
가문의 전통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후손들에게 전수되는 것이므로 좋은 것, 훌륭한 것, 가치가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야 자랑할 만하고 전수할 가치가 있다.
반듯한 전통이 있는 가문에서 훌륭한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사람의 본분이 무엇이고, 힘써서 지켜야 할 도리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알게 되기 때문에 훌륭한 인격을 갖출 수 있고, 또 위대한 발자국을 남기게도 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후세들에게 전수해야 할 가문의 전통은 무엇인가?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그 어머니와 외조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었다. 믿음의 가문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나온 것이다. 경건한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삼는다면 결코 후회할 게 없을 것이다. 좋은 신앙의 전통이 전수되는 가문에서는 끊이지 않고 위인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목사, 황선원)
## 모두가 양반의 가문
양반과 상놈의 가문을 잘 따졌던 우리나라에서 결혼전 상대방의 가문을 살피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풍습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으며 거의가 다 형식적인 것이지만 한번씩은 따져보는 실정이다. 그런데, 선을 볼 때면 하나같이 자기네들 집안이 다 양반의 집안이라고 자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가문만이 유일한 양반이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의 가문이 상놈이라고 자수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다 양반의 가문이라 인정하면서 왜 따질까?(목사, 이신구)
# 가뭄/ 갈증, 곡식, 기근, 땅, 물, 비, 빈궁, 우물, 홍수, 흉년.
## 가뭄을 극복한 믿음
자연이 주는 재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느 곳에도 없다. 아무도 자연의 재해를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뭄이 극심해질수록 인간은 소망을 잃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가뭄은 이길 수는 없을지 몰라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 한 방울 오지 않아 농작물이 다 말라 비틀어져 가도 주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마실 물이 한 방울도 없는 사막 한 가운데 홀로 있다 하여도 주님을 향한 신앙이 있을 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생명수이시기 때문이다.(사모, 이혜영)
## 천기를 아는 지혜
옛날 우리 선조들은 일기예보를 해주는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경험에 의한 일기예보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개구리가 울면 비가 올 것이라는 것과, 가뭄 속에 어느 날인가 개미가 떼를 지어 이동하면 비가 올 것이라는 것들이다. 이뿐 아니라, 밤에 달무리를 보게 되면 다음 날 비가 온다는 것이다. 또 햇무리를 보아도 비가 올 것을 미리 짐작했다는 것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늘을 보고 비가 올 것을 미리 알곤 하였다. 인간의 경험이나 삶에 대한 예견은 끊임없이 계속되어져 내려왔는데, 이는 나쁜 환경에 대처하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진작 알아야 할 천기를 외면하고 있다. 영적인 가뭄을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가뭄이 극심하여 단비가 간절히 요구되어지는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이를 예수께서도 강하게 꾸짖으셨다. 이제부터는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 주를 기다리자.
## 가뭄에 오래 견디려면
호숫가에 고기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넓은 웅덩이 쪽의 고기와 작은 웅덩이 쪽의 고기가 함께 호수에 있었다. 둘은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도 잠깐,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아 호수는 점점 말라갔다. 이제 그들은 웅덩이에 고인 물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다.
하늘을 보니 좀처럼 비가 올 것 같지 않았다. 태양은 쨍쨍 내리 쬐어 웅덩이에 있는 물마저도 말라가고 있었다. 작은 웅덩이에 있는 물고기는 이제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물 속의 산소가 부족해 오면서 물이 이제 턱밑에까지 말라왔다.
작은 웅덩이에 있던 물고기는 큰 웅덩이에 있는 물고기가 궁금해졌다. 몸부림치며 마지막으로 그 물고기가 보고 싶어서 팔짝 뛰어 올라 보았다. 그 순간 그 물고기는 큰 웅덩이에 살고 있는 물고기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살고 있음을 발견했다. 물고기는 점점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외쳤다.
“나도 큰 웅덩이에서 놀 것을… ”
우리는 어쩌면 물고기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거하는 웅덩이가 어떤 크기의 것인지를 판단해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품으로 어서 나아가자. 결코 마르는 법이 없는 촉촉한 품이리라.(목사, 홍순우)
## 가물어도 살 수 있는 것은
사막에 선인장과 풀이 있었다. 때마침 비가 오는 우기인지라 풀은 열심히 자라 쭉쭉 뻗어 나갔다. 자신의 성장을 자랑하면서 풀은 아무런 변화없이 묵묵히 서있는 선인장을 향하여 놀려댔다. “얘, 너는 왜 크지를 않니?” 선인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기가 마치고 이젠 건조한 바람이 불더니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싱싱하게 자라던 풀도 이젠 성장을 멈추고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자랄 때의 속도처럼 빠른 속도였다. 죽어가는 풀이 선인장을 보자 선인장은 이번에도 아무런 변화없이 사막을 떠받치기라도 하듯 견고하게 서있는 것이 아닌가? “얘, 가물어도 살 수 있는 너의 비밀이 뭐니?” 시들어 가는 풀이 애원하듯 소리치자 선인장이 입을 열었다. “그건 말이야, 비가 올 때 물을 몸 속에 저장해 두었다가 비가 오지 않을 때 그것을 먹는 것이란다.”(사모-이혜영)
## 물의 가치
목마른 사람이 참 물 맛을 아는 법이다. 아무리 귀한 것도 풍부할 때에는 그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한다. 물도 마찬가지다. 수도꼭지만 틀면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가뭄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의 가치는 금보다도 귀하다. 금이 없다고 죽는 사람은 없으나 물이 없으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
풍부할 때 물의 가치를 바로 알고 귀하게 간수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영혼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주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풍부할 때 귀한 줄 알아야 후회할 것이 없게 된다. 가뭄이란 어느 시대에나 예고없이 찾아온다.(목사, 황선원)
## 물의 중함
사람의 몸에서 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몸은 80%정도가 물이고 어른은 남자가 65%, 여자가 55%정도가 물이라고 한다.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두달 쯤은 살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일주일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물을 공급해 주는 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다. 당장에라도 가뭄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어지면 나타나는 자연의 현상 가운데에도 가뭄은 예외가 아니다. 가뭄은 기근의 원인이 되며 곧 인류는 굶주림에 허덕이게 될 것이다.
평소에는 물의 중요함을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며칠만 비가 오지 않으면 문제는 달라진다. 서로 물을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어질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보다 더 심각한 가뭄이 예상되는데 그것은 오염에 의한 가뭄이다. 지구상의 모든 물이 오염된다면 가뭄으로 인한 결과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인류는 물을 소중히 여기며 잘 관리해야 한다. 물은 곧 생명이며,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흘러 내렸던 네 개의 강줄기가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생명의 귀한 젖줄이었듯이, 우리는 물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더 깨달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를 주신다고 하셨다. 확실히 천국에서도 물은 필요할 것이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마시던 물과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귀중한 생명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목사, 이신구)
# 가시/ 나무, 날카로움, 멍에, 면류관, 아픔.
## 작은 가시지만
누구나 다 겪어본 일이겠지만, 아주 작은 가시가 손가락에 박혀 고생한 적이 있다. 손이 너무나 아파서 거의 울상이 되다시피 하며 쩔쩔매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와 내 손에 박혀 있는 가시를 빼 주었을 때의 그 상쾌함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빼어낸 가시를 보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것이었다. “아니 이것이 저를 그렇게 괴롭혔단 말예요?” 나는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면서 그 작은 것의 힘에 대해 두려움 속에 빠지고 말았다. 혹시 내가 하나님께 이와 같은 가시의 존재가 아닐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가시처럼 쓸모도 없는 존재면서 하나님의 손에 박히듯 그분을 아프게 하는 못된 가시가 아닐지, 너무 부끄럽고 겁이 난다.(사모,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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