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기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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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기회 외)
▶아라비아의 속담에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화살'인데, 이는 한번 과녁을 향해 겨누고 쏜 화살은, 곧장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키기 때문이요, 둘째는, '급하게 뱉어낸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영향을 주는 '급하게 뱉어낸 말'도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과거 생활'인데,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 생활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아무리 후회를 하고 탄식을 해도 그 걸어온 발자취를 지워버릴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가 바로, '황금과 같은 기회'인데, 우리가 아무리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를 써 봐도 한번 가 버린 기회는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대 신화에 '기회'라는 여신(女神)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신의 모습을 보면 아주 이상하고 무섭게 생겼습니다. 바로, 앞모습은 '더벅머리'이고, 뒷모습은 '대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벅머리는 쉽게 잡을 수가 있듯이, 기회가 앞에 있으면 그 기회를 잘 잡을 수 있지만 대머리는 잡을 것이 없는 것 같이, 한 번 왔던 기회가 지나가면 뒤에서 아무리 잡으려고해도 잡을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옛날부터 부부애가 좋은 사람을 금슬(琴瑟)이 좋다고 말합니다. 금(琴)은 거문고를 말합니다. 슬(瑟)은 비파를 말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잘 어울려 연주되면 최상의 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 조화는 신비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잘 어울리면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리는 것과 같은 신비한 소리가 나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에 <아내와 잘 합하는 것은 금슬을 고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에서 금슬좋은 부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시골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늘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자기의 믿음이 제일 좋은 것처럼 으스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친구가 넌지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만약 자네에게 소가 열 마리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소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소가 한 마리도 없다네."
친구는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말이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는 또 쉽게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한 마리뿐만 아니고 열 마리라도 다 드려야지. 그러나 내게는 말도 없는걸 어떻게 하겠나."
친구는 마지막으로 또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돼지가 열 마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 한 마리는 하나님께 바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그 농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역정을 냈습니다.
"자네! 간밤에 우리 집 돼지가 새끼를 열 마리 낳은 것 어떻게 알았어?"
물론 우스개이야기입니다만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돼지 가운데 한 마리를 하나님께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앞으로 소나 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큰 소리 치는 사람은 언제나 시원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사실 언제나 말이 없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었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그가 잠시 머리도 식힐 겸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때마침 그곳에서는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채플린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유명했습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습니다.
모두들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을 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그곳에서도 했습니다.
그런데 심사결과는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했습니다. 그는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입니다.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화입니다.
▶헬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크산티페는 소문난 악처였습니다. 하루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과 함께 이런저런 토론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크산티페는 그를 향하여 바가지를 긁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남자가 되어서 처자식이 굶는지 안 굶는지도 모르고 밖으로만 쏘다니면 다예요? 들어오기는 왜 들어와요? 차라리 나가서 살지!"
그러면서 바가지에 찬물을 담아서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소크라테스는 쓴웃음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결국 물벼락이 떨어지는구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참다못해 그를 밖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여보게! 어떻게 저런 여자하고 일평생을 같이 살 수 있겠나? 그러니 지금이라도 갈라서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때 소크라테스는 이런 명언을 했습니다.
"아닐세! 나는 늘 내 아내로 인해서 감사한다네. 생각해 보게나. 만일 내게 저런 악처가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철학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고, 고쳐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할 일뿐입니다.
▶미국에 사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남자는 어느 날 한 아리따운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얼굴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살림은 엉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너무 게을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눈이 삐었구나! 여자는 얼굴이 전부가 아닌데, 왜 내가 그 사실을 잊어버렸을까?'
결국 그는 자기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지런한 여성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딱 맞는 매우 부지런한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지런한 것까지는 좋은데 입마저 부지런한 것이었습니다. 잠시도 쉴 새 없이 혼자서만 지껄였습니다. 질려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또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좀 더 신중해야 했었는데…' 결국 그 여자와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조용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또 문제가 있습니다. 조용한 것은 좋은데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장점을 보고 결혼했다가 단점이 생기면 이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는 결국 두 손 들고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은 가위 바위 보와 같구나.' 무슨 뜻입니까? 가위 바위 보는 언제나 이기는 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위는 바위에게 집니다. 그러나 보자기는 이깁니다. 보자기는 바위에게는 이깁니다. 그러나 가위에게는 집니다.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아울러 모든 사람에게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또한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간증
"내가 회심을 하고 중생을 체험하기 전에도 선교사였으며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열심으로 믿었고 온갖 교회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요 종의 믿음을 가졌었습니다. 종의 믿음은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믿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전도의 시기
어느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습니다. 꼭 자기는 주일날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데 전도는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예수를 믿으란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 같이 일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도 다른 이야기는 늘 하지만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은 설교를 듣고 나서 전도를 못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꼭 전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기 회사 사무실에 나가서 사장 자리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자기 비서였습니다. 가만히 생각 해보니까 이 비서에게 한번도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비서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지 하면서 사장은 다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서는 "제가 사장님을 15년 동안 모셨는데 저한테는 한번도 전도를 안 하셔서 제 생각에 저 같은 존재는 예수를 믿을 수도 없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한테 전도를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에 다니겠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다니엘 웹스터의 신앙
워싱턴에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요, 학자요, 언론인이었던 다니엘 윕스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같은 시에 있는 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 시골의 작은 교회만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웹스터씨, 왜 그렇게 하십니까?"
웹스터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시내의 내 얼굴을 아는 교회에 나가면 목사들이 정치인 웹스터한테 설교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내게 필요한 소리 '죄인 웹스터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 가를 들려줍니다. 이것이 제가 듣고 싶은 설교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변화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 대신 심판 받아 멸망 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 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지름길은 없다
한 희랍의 수학자가 "기하학에 지름길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말은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나 하고 궁리하는 젊은 학도들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들도 알고 있듯이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우리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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