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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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화
▶나는 미국에 가서 한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그 호텔에 투숙한 이유는 주인이 한국인이었고, 더구나 집사님이었습니다. 이왕이면 그런 분의 사업을 도와 주는 것이 조그만 애국심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서 머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종업원이 50명 가량 되는데 한국인은 한 명도 안 보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남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성실하지 못 하고 진실하지 못 합니다. 보는 데는 충실한 데 안 보면 속입니다. 차라리 남의 나라 사람을 쓰면서 일을 시키는 것이 편합니다.'
이것이 대답이었습니다. 청결하고 정직하여야 하나님이 창대케 하여 주십니다.
▶아인슈타인은 금세기 최고의 석학입니다. 그를 능가할 물리학자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듣거나 그 분과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해박함에 경탄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창대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는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 많은 지식과 지혜와 학문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때 아인슈타인은 잠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실험 기구 속에 물이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 손가락 하나를 넣었다 뺐습니다. 물 한 방울이 손가락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는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내 학문과 지식과 지혜는 바다에 비하면 이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이같이 자기를 하나님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평가하면서 늘 더 높은 것을 추구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하고 항상 교만하지 않고 정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인슈타인을 크게 창대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창대 하게 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이런 감동스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농어 낚시 금지 기간에 생긴 일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농어 낚시 금지가 풀리는 날입니다. 그 전 날 저녁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갔습니다. 고기들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밤이 깊어 가도록 낚싯대를 내렸습니다. 밤 10시 30분이었습니다. 이제 한 시간 30분만 있으면 농어 낚시 금지가 풀리는 시간입니다. 그 때 아들 낚싯대에 큰 고기 한 마리가 걸렸습니다. 아들은 좋아서 낚싯대를 당겼습니다 월척이 넘는 농어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농어 낚시 금지기간이다. 도로 풀어 주어라.'
아들이 흥분하여 말했습니다. '아버지! 처음 잡은 고기예요. 이제 한 시간 조금 지나면 금지 기간도 풀리는 데요.... 그 때까지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아들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자.'
아버지와 아들은 농어를 다시 풀어 주었습니다. 평생 그렇게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부자는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항상 정직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청결하고 정직한 사람을 시작은 미약하나 창대 하게 해 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습니다. 가기가 편한 길이 있고 가기가 어려운 길이 있습니다. 밝은 길이 있고 어두운 길이 있습니다. 또 의의 길이 있고 불의의 길이 있고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가는 길이 있고 생각해야 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경건한 길이 있고 쾌락의 길이 있고 높은 길이 있고 낮은 길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왜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는가 하면 우리 앞에 이렇게 길이 두 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길이 하나밖에 없다면 고민도 없고 갈등도 없을 것입니다. 길과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데 무슨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언제나 이 두 길이 있어서 고민이 주어지고 갈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려는데 두 직장이 나타났습니다. 한 직장은 대기업으로 취직을 하기만 하면 미래나 현재나 장래가 보장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해서 좋습니다. 그런데 일이 너무 많아서 주일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매력은 있는데 결정적으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비 신앙 인이라면 그런 경우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직장은 중소기업인데 그곳으로 결정하면 주일생활은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의 화려함이 별로 없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래서 결정하려고 하니까 자존심이 상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주저하지 않고 모두 대기업으로 가는데 나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 두 자리를 놓고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디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아들이 그런 고민을 한다면 어디를 선택하라고 권고하시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 경험해야 하는 고민과 갈등이 그렇게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 한 예가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은 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한 남자는 우선 참 잘 생겼습니다. 매력적입니다. 마음에 끌립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 편입니다.
그런데 또 한 남자는 생긴 것은 별로 입니다. 그런데 환경이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때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딸에게 누구를 택하라고 권고하겠습니까? 여기서 고민이 따르고 갈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나 자신이 해결하고 결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책임도 내가져야 하고 손해도 내가 보아야 하고 성공도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에게 많은 아들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인과 아벨 둘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로 가인을 소개하였고 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로 아벨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 두 아들이 서로 상반된 길을 걸어갑니다. 가인은 인간 중심적으로 살아간 사람의 대표입니다. 가인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갔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면 내 삶에 하나님에 대한 부분이 그만큼 축소됩니다.
가인의 인생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 결국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그 당시는 좋습니다, 화려하기도 합니다. 재미도 있고 편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말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인생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벨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의 결과를 보여 주시려고 아벨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려면 우선 인내의 삶이 필요합니다. 경건과 절제와 좁은 길을 가야하는 수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아벨의 삶의 모습은 인내와 경건과 수고와 아픔과 피 흘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계속해서 영적인 복을 받습니다. 그 두 사람의 삶의 형태를 보여주고 성경은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두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조합니다. 그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몫입니다. 결단도 자신이 해야 하고 결과도 자신이 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옛날에는 죄를 지으면 금방 벼락도 내렸고 땅이 갈라지기도 하였고 하늘에서 불이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죄를 지어도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맑고 따뜻하게 태양이 빛납니다.
여러분이 오늘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금방 벼락을 내리시겠습니까? 내가 오늘 주일 한번 빠졌다고 하나님이 오늘 밤 꿈에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야단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지금도 여전히 벼락이 내리고 기적일 일어나고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도 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일일이 보여 주시려고 기적을 나타내셨지만 오늘은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노여움과 탄식과 경고와 메시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어느 처녀에게 애인 둘이 생겼습니다. 한 남자는 가난한 집 아들인데 참 잘 생겼습니다, 그런데 또 한 청년은 부잣집 아들인데 좀 못생겼습니다. 아버지가 '두 청년 중 누구한테 시집가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딸이 대답하기를 '낮에는 부잣집 아들과 살고 밤에는 가난한 집 아들과 살고 싶어요'하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동가숙, 서가식이라는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추석 명절 때 아들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추석에 내려가야 하는데 주일이라 내려갈 수가 없네요' 그 말에 어머니는 매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그러면 할 수 없지' 실망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래서 용돈 좀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어머니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활짝 펴지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됐지 바쁜데 무얼 하러 와'하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어느 집에 탈옥한 무장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남편은 무서워서 떨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보통 때에 강하고 결정적일 때 약해지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내는 오히려 의연하고 침착했습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니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정말 잘못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말 무서운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그때 아내가 무장 강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총을 놓고 여기 앉으세요, 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할 테니 좀 기다리세요.' 아주 놀라운 태도입니다.
강도가 생각하니까 이 여자는 참 독한 여자였습니다. 이렇게 독한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여자예요, 당신이 지금 날 쏘아 죽이면 나는 천국에 가요, 그런데 뭐가 무서워요, 내가 가진 이 마음을 당신도 가질 수 있어요'
이 여인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밥을 지어 먹이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 나갔습니다. 새벽 3시에 강도가 이 집에 들어왔는데 아침 10시에 이 강도가 순순히 총을 놓고 자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 탈옥 무장 강도 사건은 이렇게 아무런 부작용 없이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힘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이 탈옥 무장 강도는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정복하고 있다. 이것을 컨트롤이라고 말합니다. 이 무장 강도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을 모두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힘을 과시할 수도 있습니다. 명령할 수도 있고 호령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밖으로 나타난 우리들이 흔히 느끼고 보는 힘'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이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나치, 일본군국주의, 공산주의, 국수주의, 독재정권 모두 이 힘에 의해서 이 세상을 지배했었습니다. 나치가 그 힘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공산주의가 그 힘을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죽이고 그랬습니까? 독재정권이 얼마나 그 힘을 남용했습니까?
지금도 가정에서 큰 소리로 힘을 과시하는 집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아직도 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회사도 있습니다. 국가들 간에도 이 힘으로 지배하고 있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밤에는 이 힘을 가진 사람들이 활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제는 이 힘으로 지배하는 시대는 지나버렸습니다. 이제는 나라도, 회사도, 가정에서도 이 힘으로 다스리고 지배하고 과시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힘으로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엊그제 토픽 난을 보니까 5미터 되는 뱀이 1.5미터 되는 악어를 잡아먹다가 배가 터져서 죽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힘이 다가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한 후에 시세를 몰아 러시아까지 진격하려고 했습니다. 출정전날 밤 귀족부인을 초청해서 식사하던 자리에서 이 나폴레옹이 전쟁 계획을 설명해 주면서 너무 지나치게 승전을 자신했습니다.
때로 힘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과신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치고 호언하고 지배하고 장담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던 부인이 '계획은 인간이 하지만 그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나폴레옹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모든 것은 내가 계획하고 내가 이룹니다.'
이것이 힘을 가진 사람의 만용의 태도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만용 하게 되고 그 힘을 맹신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유배생활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힘있는 자리에서 그 힘을 과시하고 남용했던 사람들이 그 자리를 물러난 후에 다 심판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겉으로 나타나고 보이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이 사람들을 현혹하고 미치게 하고 숭배하게 하고 과신하게 해서 결국 넘어지게 만듭니다.
▶민주주의 힘은 어떻게 보면 무질서하고 약한 것 같고 중구난방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가 이 땅을 정복할 것 같이 기세가 등등하던 공산주의, 독재정권, 히틀러, 군국주의 일본을 무너트리지 않았습니까? 민주주의에는 총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들이 모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강한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이 힘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독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은 무조건 강해야 강한 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국 수상 처칠을 태운 차가 과속하다가 교통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때 처칠이 문을 열고 교통경찰에게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지금 각료회의 가는 중이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교통경찰이 '예 얼굴은 수상각하와 비슷합니다만 법을 지키는 것은 비슷하지 않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에 감동을 받은 처칠이 경시총감을 불러서 그 이야기를 다 하고 그 경찰을 일 계급 특진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총감이 '과속차량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라는 규정은 없습니다'하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이 힘이 얼마나 강한 힘입니까?
▶또 하나는 '햇빛의 힘'입니다. 이 햇빛이 참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강한 비바람, 태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이 태풍은 참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을 무너트리고 온 세상을 뒤집어엎어 놓습니다. 이 태풍이 이 세상을 뒤집어엎고 무너트리고 부러트립니다. 그래서 태풍이 몰려오면 우선 마음이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이 태풍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람들은 옷깃을 더 단단하게 여밉니다. 이 힘이 아무리 강해도 땅속의 새싹을 돋아나게 하질 못합니다. 사람들이 입은 겉옷을 벗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꾸만 움츠리게 합니다. 그래서 태풍이 밀려오면 사람들은 더 단단히 무장하고 단속하고 더 강하게 붙잡아 맵니다.
그런데 햇볕은 소리 없이 내리 쪼이지만 땅속에 움츠리고 있던 새싹들을 돋아나게 하고 얼음을 녹이고 옷을 벗기고 꽃이 피게 만듭니다. 햇빛은 태풍보다, 독재보다, 폭군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드러움의 힘입니다.
▶진정 더 큰 힘이 있습니다. 어떤 힘인가? 복음의 힘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능력은 햇빛보다 월등히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재정권과 비교도 되지 않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얼마나 강했습니까? 로마제국이 얼마나 강력한 군사력과 지배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로마는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신앙 지도자였던 어거스틴 조차도 로마는 영원할 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후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거기에 비해 당시 로마에 전도하려던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초라했고 무력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독수리로 표현되었습니다. 창공을 자유자재로 날고 먹이를 발견하면 피할 동물이 없을 만큼 기개와 용기와 강력한 힘을 가진 독수리가 곧 로마였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로마는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무력했습니다. 로마가 한번 짓밟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만큼 초라하고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당당하던 로마가 이 무력하고 초라하게 보였던 기독교로부터 마침내 정복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복음의 능력이 그 후 2천년동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힘이 곧 복음의 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은 무력이 아닙니다. 총칼도 아닙니다. 독재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내 속에 임재하셔서 주시는 그 무서운 힘으로 세상을 점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주 자신 있게 고백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얼마나 자신에 찬 고백입니까?
우리는 이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힘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힘이 임재함으로 얻어지는 그 힘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힘을 입고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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