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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짐 엘리엇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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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짐 엘리엇 외)



  ▶1950년대에 선교의 영웅이라 불리던 선교사 짐 엘리엇(Jim Eliot)의 말입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정글에서 순교한 후에 발견된 일기장에 기록된 글입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러한 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을 위하여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 청춘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릴 수 있다면 결코 어리석지 않다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은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뉴저지의 듀르 대학에 필리핀의 한 학생이 유학을 와서 기숙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다음 날이 주일이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한 중년 신사가 우산 두 개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학생. 나는 이 대학 교수요. 이 마을에 훌륭한 교회가 있는데 나랑 같이 가보지 않겠소? 나랑 같이 교회에 갑시다.' 그리고 교수가 학생에게 우산을 내밀었습니다.

  그 대학에 처음 입학하였는데 그 대학 교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기본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따라 갔습니다.

  '예. 교수님. 가보겠습니다.' 그는 우산을 받아들고 교회로 따라갔습니다.

  하루만 가보려고 했는데 교회에 가니 왠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 교회에 나갔습니다. 결국 은혜를 받고 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진로를 바꾸어 3년 동안 다시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서 필리핀으로 돌아가 큰 역사를 일으키고 얼마 전에는 필리핀 전국 교회 대표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취임식을 할 때 설교 주제가 '우산 두 개'이었습니다. 자기 학교 교수가 우산 두 개를 갖고 와서 하나를 내밀 때, 그때 그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십자가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로 인도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교회로만 인도하는 것도 전도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기르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여야 합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12;3-4)



  ▶온양온천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어떤 권사님과 상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부댁이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재산은 100억대가 있습니다. 외로웠습니다. 결혼하기는 싫었습니다.

  그 재산이 모두 남편이 남겨준 재산인 데 시댁에 미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데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 가서 원장님과 상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딸을 하나 기르고 싶다고 하여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다가 호적에 입적시키고 길렀습니다.

  권사님은 그 딸에 온통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잘 자라 주기만 하면 모든 재산이 그의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여 주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습니다. 모든 것에 우수하였습니다. 권사님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잘 해주기만을 바랬습니다.

  또 기대에 어긋나기 않게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발견되었습니다. 가출이 잦았습니다. 용돈이 넉넉하니까 남자 친구들을 사귀어서 놀러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는 것을 여관방에 가서 데리고 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제는 용돈을 엄청나게 요구합니다. 밤낮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닙니다. 말리면 포악하여 갔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친척들은 호적에서 파버리라고 야단들이었습니다. 형제들도 재산에 탐을 내면서 없던 것으로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그 딸을 호적에서 정리하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목사님! 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저 년이 잘 해주면 복 덩어리인데 복을 차고 있어요' 하소연하는 권사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삼천포 항공기능 대학교 학생들이 스승에게 1 m 정도 되는 막대기를 선물하여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 할 때 우리를 때려서라도 지도하여 달라고 하는 거룩한 요청이었습니다.

  그 유래는 이런 것입니다. 지리산 기슭에 있는 서당들에게는 옛날에 모두 화젓가락이 문설주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합천 현감은 권력도 있고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불행하였던 것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늘그막에 아들이 하나 태어났습니다. 옥이야 금이야 은이야 길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길렀습니다. 부자에 외아들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면서 멋지게 자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 아이는 버르장머리가 점점 없어졌습니다. 아버지에게 쌍소리도 하고 아버지를 발길로 차기도 하였습니다. 견디다 못 해 해인사 큰스님에게 맡겼습니다. 죽여도 좋으니 사람만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여도 좋다는 각서를 문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맡은 해인사 큰스님은 도저히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양반이고 중은 중이라고 얼마나 무시하는 지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발길로 큰스님을 차기도 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습니다.

  큰스님은 할 수 없이 그 아이를 기둥에 붙잡아 매놓고 며칠을 굶겼습니다. 그리고 불 젓가락을 시뻘겋게 달게 한 후 가지고 가서 죽여도 좋다는 아버지의 각서를 보여주고 넓적다리는 찔렀습니다. 반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 아이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내가 과거 급제하여 고관이 된 후 저 중에게 복수하리라>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 서당들은 모두 회젓가락을 문설주에 매어 놓고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부모가 기대하는 이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헌 집을 다시 지으려고 벽부터 헐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벽은 10년 전에 쌓은 벽이었습니다. 벽을 헐던 인부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 벽 속에 도마뱀 하나가 발이 못에 박힌 채 살고 있었습니다. 겉에서 못을 박았는데 그 곳에 도마뱀이 있다가 다리에 못이 박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마뱀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았나 보았더니 아내 도마뱀이 계속 먹을 것을 물어다 남편 도마뱀에게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내 도마뱀은 남편 주변을 떠나지 않고 10년을 먹여 살린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내 도마뱀이 도망가 버렸다면 그 도마뱀은 며칠 안 지나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아내 도마뱀은 남편이 어느 날인가는 건강하게 살아갈 날을 희망을 잃지 않고 먹여 살렸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 일본 노무자들은 부부 도마뱀을 편안한 곳으로 옮겨 먹을 것을 주면서 행복한 부부 도마뱀으로 기르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포도주 집을 경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 마을에 포도주를 파는 집에 둘이었습니다. 둘이서 마차를 한 대 끌고 먼 곳에 포도주를 사러 같이 갔습니다. 같이 마차 한 대를 빌리는 것이 경제적으로 반값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큰 통으로 한 통을 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반 나누기로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추웠습니다. 한 명이 주머니를 보니 마침 1,000원짜리 한 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가 다른 포도주 상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지금 추워서 견딜 수가 없네. 자네 포도주 반 가지고 갈 것에서 1,000원에 한 잔을 팔게'

  그는 개시가 좋다면서 반 나눌 때 한 잔을 더 가지고 가기로 하고 한 잔을 주었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몸도 따뜻하여 졌습니다. 얼마쯤 갔을 때 1,000원짜리를 가지고 있는 이가 추움을 느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여보게! 아까는 내가 팔았으니 이제는 자네가 팔게' 그래서 팔라는 데 안 파는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한 잔을 1,000원에 팔았습니다.

  얼마 후 그가 말했습니다. '한 잔 더 팔게' 그래서 오면서 1,000원이 오고 가면서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 와 보니 포도주가 한 잔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큰하게 취하여 말했습니다.

  '아하하! 우리는 기적의 사나이다. 돈 1,000원으로 포도주를 실컷 마셨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내 살 깎아 먹는 줄도 모르고 즐거움에 취하여 있지는 않은가요? 내 재산이 사라지는 지도 모르고 오늘 이 순간만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704년 독일의 베냐민 슈몰크 목사 내외가 멀리 심방을 갔다 왔습니다. 집에 와 보니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혹시 하고 잿더미 속을 뒤져보니 자식 둘이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의 시신을 안고 두 부부는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사탄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때 대부분 사람들은 심한 원망과 불평과 불 신앙의 태도를 보이게 마련입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서 내 아이들이 불타 죽었다'고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때 누구나 인간이라면 의기소침되고 낙심하고 탄식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때 그 목사 부부가 한동안 울부짖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며 망연자실하여 충격 속에 있다가 한참 후에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부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부부가 마침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그때 그 목사 부부가 고백한 눈물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얼마나 간결하며 그 속에 신앙고백이 다 들어 있습니까. 어디를 보아도 원망이나 불 신앙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글에 Von Weber 라고 하는 사람이 곡을 붙여 오늘 찬송가 549장이 된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든든히 세운 분입니다.

  당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사상에 물들어 잘못된 기초 위에 세워졌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많은 지식과 견문으로 이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기초를 세웠고 제헌국회 때에는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이윤영 목사님에게 하게 했습니다.

  그는 실수도 있었습니다. 3선만 하고 물러섰으면 흠이 없는 국부로 추앙을 받았을 터인데 인의 장막에 둘러 쌓여 재집권 하려고 사사오입 계산법으로 개헌까지 하며 억지를 부리다가 4.19학생 혁명으로 물러나 슬픈 황혼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그의 업적은 너무나 커서 한국의 국부(國父)라고 불러도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가 반공포로 석방을 과감히 단행한 것도 영웅적 처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공포로였던 사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아버지로 생각합니다. 반대하던 트루먼(Harry Shippe Truman) 대통령도 이승만 박사를 두려워했고 모택동도 이승만 대통령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형식적인 신자가 아니라 감옥생활을 할 때 성령의 체험도 한 거듭난 신자였습니다. 좌파들이나 전교조들이 왜 이승만대통령을 온갖 욕을 다하며 미워하느냐 하면 그 분 때문에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적화통일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1960년 7월 18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데 꿈에도 소원이 살아서 귀국하는 것이었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시신으로 귀국하여 고국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부정축재가 많다고 부패한 정치인이라고 악평을 했지만 1960년 6월 7일 정일형 의원이 제안하여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의 숨겨진 재산을 찾아내려고 '특정 재산조사 위원회'를 만들어 돈암장을 샅샅이 뒤지고 해외 도피와 부정 축재 등에 관한 소문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했습니다.

  돈암장에서  이승만대통령 내외분은 너무나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내복도 양말도 다 낡은 것을 기워 입은 것을 지금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빈 사람으로 친정이 부자여서 틀니 할 돈 3000불을 받아 가지고 오다가 달러를 한 푼이라도 외국에서 쓰지 않고 한국에서 쓰겠다고 그 돈을 가슴에 품고 왔다고 합니다. 돈암동에 있는 돈암장은 대통령이 되기 전 유지들이 사택으로 사드린 것입니다. (당시 3억 환)

  세계 통신사옥은 당시 1억 환에 산 것이라고 조사결과 나왔습니다. 하와이에서 사시는 동안 프란체스카 여사가 식료품을 사러 가면 '남은 것이 있는데 조금만 사와, 돈을 다 써버리면 서울에 못 가'라고 했답니다.

  이런 청빈한 대통령이 어디 있습니까? 훗날 로버트 올리버 씨는 회고록에서 '이 박사는 부패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이 박사 부부는 1960년 한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할 때도 가난했다. 그는 수중에 돈 한 푼 가진 것 없이 교포들의 기부금으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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